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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FLOW · 소식

누구나 만드는 시대, 하지만 사랑받기는 어려운시대 — 내가 트라피스트를 만든 이유

AI가 만든 것은 코드가 아니라 안전한 평균이며, 실행이 쉬워질수록 프로덕트는 서로 닮아간다. 결국 오래 남는 것은 도구를 먼저 쓴 사람이 아니라, 그 도구 안에 세상에 없던 장면과 소리를 담은 사람이다. 취향은 재능이라기보다, 내가 못 견디는 문제를 오래 붙들고 계속 깎아내며 생기는 고집의 부산물이다. 트라피스트는 흩어진 공연 정보를 “지금 갈 수 있는 무대의 지도”로 바꾸려는, 평균 밖으로 나가려는 작은 실험이다.

▎ AI로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는 모든 프로덕트 메이커에게.

당신이 어제 배포한 그 화면은 세상에 하나뿐인 무언가인가요, 아니면 AI가 가장 안전하게 골라준 '평균의 얼굴'인가요?

요즘 새로 나오는 사이트는 이상하게 다 닮았어요. 보라색 그라데이션, Inter 폰트, 그리드에 카드 네 장.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다 적당히 예뻐요. 그게 문제예요. 만드는 일이 공짜가 되자, 모두가 같은 문으로 나오기 시작했거든요.

값이 싸진건 기술이지, 사람을 위한 생각이 담겨 있지 않았을 거에요.

AI가 공짜로 만든 건 '코드'가 아니라 '평균'이에요.

방향을 주지 않으면 모델은 언제나 통계적으로 가장 안전한 답을 뱉어요 — 히어로 섹션, 카드 세 장, 후기, 가격표. 지금까지 가장 자주 통했던 것들의 평균값이죠. 실행의 가격이 0으로 가면, 모두의 결과물도 그 평균으로 수렴해요.

그런데 그 평균의 바다 위로 머리를 내미는 것들이 있어요. Bruno Simon의 포트폴리오는 스크롤 대신 자동차를 몰고 3D 월드를 돌아다니게 만들어요. 재밌는 건, 그가 이걸 어떻게 만드는지 하나도 숨기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전 포트폴리오는 코드를 MIT로 통째로 공개했고, 지금은 그 기술을 Three.js Journey라는 강의로 아예 팔아요. 셰프가 직접 레시피를 파는 셈이죠.

그런데도 아무도 그 사이트를 복제하지 못해요. 왜냐면 공개된 건 '방법'뿐이니까요.

- 팔 수 있는 건 how이고, 팔 수 없는 건 what과 why다.

- 도구는 공평하게 뿌려져도, '취향의 해상도'는 조금도 공평하지 않다.

- 그래서 실행이 공짜가 될수록, 격차는 좁아지는 게 아니라 벌어진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멈칫해요. 취향이라는 게 노력한다고 생기던가요? 이건 결국 재능 있는 사람들 잔치 아닌가요? 그 질문에 답하려면, 이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먼저 봐야 해요.

우리는 이런 흐름을 역사적으로 여러 번 봤어요.

음악만 봐도 그래요. 축음기에서 라디오로, LP에서 카세트로, CD에서 MP3로, 이제 유튜브와 스트리밍으로 — 매체는 쉬지 않고 갈아탔어요. 그리고 갈아탈 때마다 똑같은 약속이 반복됐죠. "이제 누구나 만들 수 있다. 게이트키퍼는 끝났다." 카세트는 침실에서 녹음하게 해줬고, 냅스터는 유통을 통째로 공짜로 만들었고, 유튜브는 무명을 곧장 전 세계로 쐈어요. 지금 AI가 하는 일을, 매체는 이미 100년 동안 반복해왔어요.

그런데 매번, 새 매체를 먼저 차지한 사람이 남은 게 아니에요. 세상에 없던 소리를 낸 사람이 남았어요.

- 에이전트는 새로운 '능력'이 아니라, 새로운 '그릇'이다.

- 그릇이 열릴 때 잠깐은 먼저 올라탄 사람이 유리해 보이지만, 그건 언제나 짧았다.

- 길게 남은 건 그릇을 잡은 손이 아니라, 그 안에 세상에 없던 걸 담은 사람이다.

카세트 공장을 제일 먼저 세운 사람 이름은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그 카세트에 담겨 돌던 노래는 아직도 흥얼거리죠. 사람이 바뀐 게 아니에요. 그릇이 바뀌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지난 100년이 알려준 게 하나 있다면, 그릇이 아무리 좋아져도 사람을 흔드는 건 언제나 '명료하고 세상에 없던 소리'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기려는 순간, 다시 평균이 된다

자, 그럼 아까 미뤄둔 질문으로 돌아와요. 취향 없는 우리는 어떡하냐고요?

사실 우리가 '취향이 없다'고 느끼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12년 동안 아무도 "너는 뭘 만들고 싶니"라고 물어봐 준 적이 없거든요.

정답이 하나인 문제를 남보다 빨리 푸는 훈련만 받았지, '네 눈에 뭐가 좋으냐'는 애초에 시험에 안 나왔으니까요. 최근엔 많이 바뀌었다지만, 그 근간은 아직 남아 있죠.

아이러니한 건, 그렇게 갈고닦은 '정해진 답을 빠르고 정확하게'가 지금 AI가 0원에 하는 바로 그 일이라는 거예요.

반대로 학교가 한 번도 안 물어본 '네 눈에 뭐가 좋으냐'가, 이제 유일하게 대체되지 않는 능력이 됐고요. 그러니 우리에게 취향이 없는 게 아니에요. 한 번도 꺼내 쓸 일이 없었을 뿐이에요.

그럼 그걸 어떻게 꺼내냐고요? 답은 "더 노력해서 감각 있는 사람을 따라잡아라"가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예요.

제임스 다이슨은 먼지봉투 없는 청소기 하나에 5년 동안 5,127개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었어요. 이건 '노력'이라는 단어로 담기지 않아요. 노력은 목표를 향해 하는 거고, '집착'은 그 문제가 나를 놓아주지 않아서 하는 거예요 — 종류가 달라요. 게다가 그는 이기려고 그런 것도 아니었어요. 완성하고 나서도 후버도, 일렉트로룩스도 전부 거절했으니까요. 시장은 그의 청소기를 원하지도 않았어요.

거창하게 들리죠? 근데 이건 5,127개짜리 위대한 서사에만 있는 얘기가 아니에요. 훨씬 작고 시시한 데서도 똑같이 작동해요.


저는 페스티벌 라인업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데, 매년 펜타포트 라인업이 뜨면 늘 같은 데서 막혔어요. 헤드라이너 몇 팀 빼면 이름만 봐선 누가 누군지 감도 안 오거든요. 그래서 한 팀씩 유튜브에 검색해 들어보는 게 매년 일이었죠. 어느 날 그게 하도 빡쳐서, 그냥 제가 만들던 서비스에 라인업에서 밴드를 누르면 그 밴드의 유튜브·스포티파이로 바로 건너가는 기능을 박아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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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될 것 같아서 만든 게 아니에요.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요. 그냥 제 눈에 거슬렸을 뿐이에요. 근데 그거면 충분했어요. 세상에 없던 건 언제나 '이기려는 계산'이 아니라 '내가 못 견디는 문제'에서 시작되니까요.

이건 반대로도 성립해요. 이기려고 접근하는 순간, 당신은 다시 '가장 안전한 평균'으로 돌아가요. 남들이 이미 통한 걸 하겠다는 뜻이니까요. AI가 슬롭을 뱉는 이유와 정확히 같아요.

그래서 저는 "우리 회사는 AI를 어떻게 써야 하나" 같은 질문이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건 여전히 효율의 질문이고, 효율로는 평균밖에 못 만드니까요. 진짜 질문은 '무엇을 세상에 내놓고 싶은가', '누구를 홀리고 싶은가'예요.

Nothing이라는 폰은 뒷판이 투명해요. 실용적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테크를 다시 재밌게 만들자"는 고집 하나였죠. 다이슨도, Nothing도, "더 싸게"로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계산이 아니라 고집에서 나온 물건인데, 그게 사람을 홀려요. 이제 와우 포인트는 가격에서 나오지 않아요. 세상에 없던 컨셉, 그리고 그걸 넘어 사람을 매혹시키는 '시스템'에서 나와요.

그래서 내일 뭘 하면 되냐고요? 세 가지만 바꿔보세요.

먼저, 핀터레스트를 매일 여세요. 거기 쌓인 건 '예쁜 이미지'가 아니라, 세상 모든 디자이너가 무엇을 왜 그렇게 결정했는지의 흔적이에요.

- 취향은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라, 좋은 것을 매일 눈에 먹일 때 쌓이는 안목이다.

- 세상 모든 디자이너의 고민과 철학이, 그 '도서관'에 공짜로 열려 있다.

다만 Bruno Simon이 코드를 공개해도 아무나 못 만들듯, 이 도서관도 매일 드나드는 사람에게만 읽혀요.

그다음, 코드 에디터 말고 디자인 툴부터 여세요.

- 무엇을 만들지가 아니라, 어떤 문제를 어떻게 '보여줄지'부터 그린다.

- 사람의 눈이 멈추는 그 한 지점 — '디자인의 킥'을 어디에 둘지부터 정한다.

화면 한 장이 사람을 멈춰 세우지 못하면, 그 뒤에 뭘 붙여도 결국 평균이거든요.

마지막으로, 끊는 자리부터 정하세요. 그리다 보면 기능도 문제도 반드시 불어나요. 대부분 여기서 길을 잃어요.

- 더하기는 누구나 한다. 끊는 자리를 아는 게 취향이다.

기준이 뭐냐고요? 당신 눈에 가장 좋아 보이는 것 — 거기서부터 시작하세요. 그게 정답이에요. 이기려는 계산이 아니라 그 감각이, 평균에서 당신을 꺼내는 유일한 '나침반'이니까요.

그래서 만든 게, 트라피스트예요

아까 펜타포트 얘기에서 '제가 만들던 서비스'라고 했죠. 그게 트라피스트예요.

라인업 노래 하나 찾겠다고 빡친 건 사실 작은 조각이었어요.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죠. 공연 정보는 늘 사방에 흩어져 있어요 — 인스타 스토리, 공연장 구석의 포스터, 어딘가의 작은 공지. 정작 '오늘 밤 내 근처에서 뭐가 열리는지'가 제일 알기 어려워요. 그게 매번 거슬렸어요.

그래서 트라피스트는 단순한 공연 '캘린더'가 아니에요. 지금·여기의 '지도'예요. 캘린더는 날짜를 보여주지만, 지도는 '지금 갈 수 있는 곳'을 보여주니까요.

- 지도를 열면, 지금 내 근처에서 열리는 공연·페스티벌·전시가 핀으로 떠요.

- 모르는 밴드를 누르면, 그 자리에서 유튜브·스포티파이로 바로 건너가요. (펜타포트에서 제가 그렇게 빡쳤던, 바로 그거요.)

- 포스터 한 장만 올리면 나머지는 알아서 이벤트가 돼요. 공연장도 뮤지션도, 홍보가 더는 노가다가 아니게.

이름은 '만드는 이들의 집(Maison de Scène)'이라고 붙였어요. 침묵 서약을 하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에서 따왔죠. 집이 조용해서, 무대가 큰 거예요. 저는 이걸로 뭘 이기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제가 못 견디던 문제 하나를, 제 눈에 좋아 보이는 방식으로 조용히 깎아둔 거예요. 투자자도 없고, 만든 사람도 저 하나고요. 이 글 내내 한 얘기, 그걸 그냥 제 손으로 한번 해본 거예요.

도구는 앞으로도 계속 공평해질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까지 불공평하게 남는 건 딱 하나, 당신 눈에 좋아 보이는 걸 기어이 세상에 꺼내놓으려는 고집이에요. 그 고집만이, 평균이 삼킬 수 없는 유일한 차별화가 됩니다.

무대는 어디에나 있어요. 8월에 펜타포트 가는 분이라면, 라인업 예습부터 트라피스트에서 해보세요. 당신의 자리는, 처음부터 거기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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